고통스러울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 판데믹 이야기

미얀마 양곤의 한 무슬림 택시 운전사가 그의 지역 사회가 코로나 판데믹 동안 어떻게 서로를 도와주고 돌봐주는 경험을 하였는지를 되새기는 이야기입니다.
U Aye Min
Country:
Myanmar

미얀마는 2020년 3월 말 코로나 팬데믹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감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모든 학교는 즉시 휴교에 들어갔다. 온라인으로 교육의 기회를 계속 누릴 수 있는 특권은 경제적 뒷받침이 가능한 이들에게만 주어졌고, 그렇지 못한 다른 학생들은 대부분 교실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내 이름은 유에민(U Aye Min)이며 무슬림이다. 양곤에서 7년 정도 택시를 운전하고 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승객이 줄어들면서 수입이 절반으로 줄었다. 하지만 차 렌트비와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여전히 가족을 부양해 나가고 있다. 나와 같이 미얀마 출신의 다른 이슬람 교도들은 공직이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소유한 개인 회사에 고위직을 얻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대부분 개인 사업체를 운영한다. 개인 사업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슬람 교도들이 운영하는 기업에 취직해야한다. 코로나가 중소기업의 90%에 영향을 미쳤지만,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큰 문제없이 팬데믹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나와 가까운 승객들이 공유해준 코로나 기간 동안의 경험을 기억나는대로 최대한 전하고자 한다.  

단골 손님인 무하마드(Muhammad)씨(44세)는 약국을 운영하는데, 코로나로 인해 바깥에서 친구들과 자유롭게 놀 수 없게 된 두 아들을 위해 뒷마당에 운동장을 만들었다. 현명한 가장인 그는 “이런 때일수록 가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라고 말했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저녁 6시까지 집에 들어가고, 그의 아들들에게 매달 가지고 놀 새 장난감을 사다 준다.  

대부분의 무슬림 부모들은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학업을 중단시키고 직업훈련이나 돈을 버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이슬람 교도들의 교육 수준이 낮을 수 있지만 이것이 가난으로 귀결되진 않는다. 경제활동을 하면서 코로나 예방과 방역 활동을 위해 기부도 하며,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할 수도 있다. 코로나 기간 동안 모든 사원과 교회가 폐쇄됨에 따라 종교 활동은 가정에서만 허락되어 왔지만, 미얀마 국민들은 다함께 코로나 퇴치를 위해 애쓰고 있다. 낯선 사람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도로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교통은 다소 불편해졌으나 사람들은 서로 돕고 돌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무하마드(Muhammad)씨는 지혜롭게도 미얀마에서 첫 확진 사례가 발생하기 전부터 중국에서 다른 나라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졌다는 소식을 듣고 방역 마스크와 손소독제를 대량으로 구입해두었다. 2020년 5월 그는 다른 약품들과 함께 마스크와 손소독제를 판매함으로써 많은 이익을 얻었다. 마스크와 손소독제 가격이 원래 가격보다 15배까지 치솟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스크 200팩과 손소독제 100개를 친구, 친척, 이웃들과 나누었다. 또한 근처에 있는 코로나 시설과 검역소에 장비와 약품을 기증했다. 그의 아내는 500여 가구에 쌀과 식용유를 기부하고 검역소에서 매일 10명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무하마드(Muhammad)씨를 포함한 일부 이슬람 교도들은 코로나 기간 동안 종교적 차별이 줄어들었다고 느꼈다. “절망속에서 희망의 빛이 드리우네요.”  그는 말했다. “수입이 줄더라도 코로나 대응을 위한 기부와 이웃들 돕기를 계속 해나갈 겁니다. 더 이상 누구도 이런 불행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무하마드(Muhammad)씨는 얼른 코로나가 끝나 아들과 함께 모스크에서 기도하고, 가족들과 미얀마 북부를 여행할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가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이슬람 교도들은 대부분 상인, 이주민, 왕실 노동자, 전쟁포로, 난민, 노예제의 희생자로 미얀마에 들어왔다. 일부 이슬람 교도들은 그들의 조상이 한때 고대 미얀마의 고위 관료, 공무원, 전통 치료사로서 명망 있는 지위를 차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슬림의 정확한 입국 연도는 알 수 없다. 1600년대에 이슬람 교도들은 아라카인(Arakanese)왕 산투담마(Sandathudamma)(1625-1684)시대에 궁수로 복무했고, 미얀마의 13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인 카만(Kaman)족이 되었다. 미얀마 무슬림의 현재 인구는 로컬 버마인과 라카인(Rakaine), 샨(Shan), 카렌(Karen), 몬(Mon)과 같은 많은 미얀마 소수민족과 혼인하여 정착한 다양한 민족의 후손들이다. 미얀마의 이슬람 교도들은 1962년까지 종교적 차별과 인종차별에 시달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단골 손님의 딸인 한 젊은 무슬림 여성은 코로나 기간 동안 대입 시험에 통과했고 의과대학에 들어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지금은 친구 관계조차 원만하지 않다. 그녀는 이슬람 자선병원에서 의사로 일할 예정이다. 어린시절, 다른 신앙을 가진 일부 부모들은 아이들이 그녀의 집에 가서 노는 것을 금지했다. 그녀는 언젠가 의사가 되면 어떤 이도 차별하지 않고 진료하고 돌볼 것을 다짐하며, 비이슬람인들과도 굳건한 관계와 신뢰를 쌓을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종교적 차별을 없애려면 상호 존중과 도움이 필수적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무하마드(Muhammad)씨와 마찬가지로 페이스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교적 차별과 혐오 발언이 코로나 기간 동안 줄어들었음을 느꼈다. “우리 미얀마 국민들 모두 코로나로 인해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어요. 무슬림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부금이나 봉사활동으로 온 마음을 다해 코로나 대응과 예방에 참여하고 있답니다.”

기술자인 그녀의 아버지는 시내에서 시계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손님과 대화할 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데, 이로 인해 코로나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자신과 다른 가족들이 감염될 수도 있다. 매장 운영이 잘 되지 않아 임대료를 겨우 내고 있다 보니 가게가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른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길가에 음식점을 열까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은 통상 첫째에게 돌아가네요.” 노점을 운영하며 가계를 책임쳐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의사가 되겠다는 그녀의 꿈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녀는 인터넷에서 찾은 건강 정보를 활용해 부모님이 외출 후 집안에 갖고 들어온 모든 물품에 소독약을 뿌려서 할머니(84)와 남동생 2명이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도록 한다.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해 친구나 동료들과도 이러한 정보를 공유한다. 그녀는 할머니와 두 남동생과 함께 영어 영화나 만화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낯선 사람이 왔다고 생각하는 막내 동생이 그저 애처롭다. “막내가 밖에서 놀거나 학교에 간 지 오래돼서 사람들을 무서워하게 된 것 같아요.”

그녀는 아버지의 시계 가게가 문을 닫기 전에 팬데믹이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 “그래야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더 힘들어지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거니까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또한 코로나 기간 동안 느낀 종교적 차별의 공백이 팬데믹 이후에도 지속되기를 바란다.

무슬림을 포함한 모든 미얀마 사람들은 오늘도 간절하게 팬데믹의 종결과 평화로운 미래를 염원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 2021년 7월

그녀는 언젠가 의사가 되면 어떤 이도 차별하지 않고 진료하고 돌볼 것을 다짐하며, 비이슬람인들과도 굳건한 관계와 신뢰를 쌓을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이 이야기는 Innovation for Change – East Asia의 요청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이는 ‘소외된 사람들의 COVID-19 이야기(COVID-19 Stories from the Margins)’라는 프로젝트의 일부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Innovation for Change – East Asia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및 베트남의 소외된 커뮤니티의 6명에게 코로나 팬데믹에서 얻은 교훈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기술을 제공했습니다.

‘The More We Suffer, The More We Love’ English version
The More We Suffer, The More We Love: A pandemic story

‘The More We Suffer, The More We Love’ Chinese version
苦难越多,爱越多: 新冠疫情故事

Resources

Collaborators

이 이야기는 원래 버마어로 쓰여졌습니다.

글쓴이 (미얀마어): 익명

옮긴이 (영어): Noel

옮긴이: 윤지영(Yun Ji Young)

우 아예 민(U Aye Min)은 미얀마 양곤에서 활동하는 무슬림 소수민족 택시 운전사로, 우 아예 민(U Aye Min)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이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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